젤펜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유가 분명하다. 볼펜보다 선이 진하고, 글씨가 또렷하게 남고, 부드럽게 써지는 느낌이 좋다. 특히 검정 젤펜으로 깔끔하게 적은 노트는 나중에 다시 봐도 읽기 편하다. 그런데 젤펜은 노트 종이를 꽤 많이 가린다. 어떤 노트에서는 정말 기분 좋게 써지는데, 어떤 노트에서는 잉크가 늦게 마르거나 뒷면에 비치고, 심하면 손날에 글씨가 번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젤펜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잉크가 많이 나오는 펜이라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같은 젤펜을 다른 노트에 써보니 결과가 달랐다. 어떤 종이는 잉크를 깔끔하게 잡아주고, 어떤 종이는 잉크가 겉돌거나 깊게 스며들었다. 결국 젤펜을 편하게 쓰려면 펜만큼이나 노트 종이도 중요하다.
이번 글에서는 젤펜으로 쓰기 좋은 노트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실제 사용감을 기준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잉크 마름 속도가 적당해야 한다
젤펜을 사용할 때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은 마름 속도다. 젤펜은 일반 유성 볼펜보다 잉크가 촉촉하게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이 위에 글씨가 진하게 남는 장점이 있지만,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면 손에 묻거나 글자가 번질 수 있다.
특히 왼손잡이이거나 글씨를 빠르게 쓰는 사람이라면 마름 속도가 더 중요하다. 글을 쓰는 손이 방금 쓴 글자를 지나가면서 잉크를 문질러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손잡이도 노트를 바로 덮거나 페이지를 넘기면 반대쪽 면에 글씨가 찍히는 경우가 있다.
젤펜에 좋은 노트는 잉크를 너무 오래 표면에 남겨두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빨리 빨아들이지 않는 종이다. 잉크가 너무 늦게 마르면 번지고, 너무 빨리 스며들면 글자 선이 퍼져 보인다. 적당히 흡수하면서 선명함을 유지하는 종이가 가장 좋다.
새 노트를 샀다면 자주 쓰는 젤펜으로 몇 줄을 쓴 뒤 5초, 10초 정도 지나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러보면 된다. 이때 글자가 심하게 번지지 않는다면 젤펜용으로 꽤 괜찮은 종이일 가능성이 높다.
2. 종이 표면은 너무 거칠지 않은 편이 좋다
젤펜은 부드러운 필기감을 기대하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종이 표면이 거칠면 젤펜 특유의 부드러움이 줄어든다. 펜촉이 종이에 걸리는 느낌이 생기고, 잉크가 고르게 나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얇은 젤펜일수록 종이 표면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표면이 거친 종이는 글자 선의 가장자리가 살짝 퍼져 보일 수 있다. 종이 섬유 사이로 잉크가 스며들면서 선이 또렷하지 않게 남는 것이다. 연필이나 샤프에는 괜찮은 종이도 젤펜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필기구마다 어울리는 종이가 다르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종이가 너무 미끄러운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코팅된 느낌의 종이는 펜이 종이 위에서 겉도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글씨가 가볍게 미끄러져서 필압 조절이 어려워지고, 잉크가 늦게 마를 가능성도 있다.
젤펜으로 쓰기 좋은 종이는 손끝으로 만졌을 때 부드럽지만, 완전히 반질거리지 않는 종이다. 펜촉이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글씨가 종이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느낌이 들면 오래 쓰기 편하다.
3. 뒷면 비침이 적어야 양면 사용이 편하다
젤펜은 선이 진한 만큼 뒷면 비침이 생기기 쉽다. 일반 볼펜으로는 괜찮았던 노트도 젤펜으로 쓰면 뒷면에 글씨가 비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검정색, 파란색, 진한 색 젤펜을 많이 쓰면 비침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공부 노트나 독서 노트는 보통 양면을 모두 쓰기 때문에 비침이 심하면 불편하다. 앞면의 글씨가 뒷면에 겹쳐 보이면 다음 내용을 쓸 때 신경이 쓰인다. 나중에 다시 읽을 때도 페이지가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젤펜을 자주 쓴다면 종이 두께를 어느 정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너무 얇은 종이보다는 80gsm 이상 종이가 무난한 편이다. 다만 숫자가 전부는 아니다. 같은 80gsm이라도 종이 표면 처리에 따라 비침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테스트하는 것이다. 젤펜으로 한 문단 정도 써보고 뒷면을 확인해보면 된다. 글자가 살짝 비치는 정도는 괜찮지만, 뒷면 글씨를 읽는 데 방해가 될 정도라면 젤펜용 노트로는 아쉽다.
4. 번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자 선의 또렷함이다
젤펜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글씨가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젤펜용 노트를 고를 때는 단순히 번지지 않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글자 선이 얼마나 깔끔하게 남는지도 봐야 한다.
어떤 종이는 잉크가 번지지는 않지만 글자 가장자리가 살짝 흐릿하게 보인다. 반대로 어떤 종이는 잉크가 종이 위에 선명하게 올라와 글씨가 또렷하다. 같은 펜으로 썼는데도 노트에 따라 글씨 실력이 달라 보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는 종이 차이가 꽤 크다.
특히 작은 글씨를 쓰는 사람에게는 선명함이 중요하다. 글씨 크기가 작을수록 잉크가 조금만 퍼져도 글자가 답답해 보인다. 공부 노트처럼 많은 내용을 적는 경우에는 글자 선이 깔끔해야 나중에 다시 읽기 편하다.
젤펜 테스트를 할 때는 단어 몇 개만 쓰기보다 실제로 쓰는 방식처럼 한 문단 정도 적어보는 것이 좋다. 제목, 문장, 숫자, 체크 표시를 함께 써보면 그 노트가 젤펜과 잘 맞는지 더 쉽게 알 수 있다.
5. 젤펜용 노트는 펜과 함께 골라야 한다
젤펜으로 쓰기 좋은 노트는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용하는 젤펜의 굵기, 잉크 양, 필압, 글씨 속도에 따라 좋은 종이가 달라진다. 0.38mm 젤펜을 쓰는 사람과 0.7mm 젤펜을 쓰는 사람은 같은 노트에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얇은 젤펜은 선이 가늘기 때문에 종이 표면이 너무 거칠면 글씨가 끊기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굵은 젤펜은 잉크 양이 많아서 마름 속도와 비침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젤펜용 노트를 고를 때는 내가 가장 자주 쓰는 펜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나는 새 노트를 고를 때 검정 젤펜 하나를 기준 펜처럼 사용한다. 그 펜으로 제목을 쓰고, 짧은 문장을 쓰고, 숫자와 선을 그어본다. 그런 다음 손으로 문질러보고 뒷면을 확인한다. 이 간단한 테스트만으로도 노트가 젤펜과 잘 맞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젤펜으로 쓰기 좋은 노트는 잉크 마름 속도가 적당하고, 표면이 부드러우며, 뒷면 비침이 심하지 않은 노트다. 여기에 글자 선이 또렷하게 남는다면 더 좋다. 젤펜은 노트와 잘 맞을 때 만족도가 큰 필기구다. 펜 하나를 바꾸는 것도 좋지만, 종이를 잘 고르는 것만으로도 필기감은 훨씬 좋아질 수 있다.